[야목가정교회] 주일예배 (천일국 4년 천력 2월 19일 일요일 (양 2016.3.27))
천일국 4년 천력 2월 19일 일요일 (양 2016.3.27) 오전 11시 야목가정교회 성전에서 황재성 교회장님을 모시는 가운데 이병하 집사님의 사회로 주일예배가 열렸습니다.
예배식순은 준비찬송 찬송가 248장, 성가 1,3장, 경배식, 가정맹세 1~8절 (PPT) 황재완 장로님의 보고기도, 훈독말씀 "2003.1.6. 탕신경축행사 (롯데호텔)", 황재성 교회장님의 말씀 "영성시대 선언의 의미", 봉헌찬송 찬송가 356장, 이종순 권사님의 봉헌기도, 결단의 찬송 성가 18장, 황재성 교회장님의 축도, 묵도, 폐회로 진행되었습니다. 

영성시대 선언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성이라는 말이 아주 보평화된 일반적인 용어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보면 영성개발 프로그램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많이 수련하고 있고 불교에서도 기신독을 대상으로 영성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할정도로 이 영성이라는 말이 사회 많은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 영역을 넘어서서 현대문화의 영역까지 일반화되어져서 사용되는 그러한 용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숨어 있는 그 뜻은 이성이나 지성을 넘어서서 신된 경지에 그 세계를 소재돼서 그 문화로 바로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전하고 엄청나게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은 종교적 배출이라고 우리는 표현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역사의 발전사를 보면 농업시대로부터 상업시대로 상업시대서부터 정보화시대로 옮겨져왔고 이제 정보화시대에서 비로소 영성시대로 가고 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되느냐? 그것은 두말할것 없이 인간들이 물질주의적 삶을 추구해옴으로 말미암아 향락주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손실을 가지고 옵니다. 자기의 손실을 가져온 하나의 결과물이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닮은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이 그대로 인간에게 투여하게 됩니다. 인간에게 전계되는 것, 인간에게 나눠진 것, 이것이 인간 속에 들어와 있는 영성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은 하나님의 성품, 신성이 인간에게 투여된 것, 그렇기에 영성의 본향이 신성이고 영성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니까 영성개발을 통해서 영성의 문을 열어넣으면 결국은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성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존재, 전체에서 자기를 실행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완성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체를 쓰고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하신 것이 바로 영성에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성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성이라는 것은 영성회복이라는 말은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자는 그런 말과도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속에 내재 있는 하나님의 사랑권을 회복해서 본연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 자체를 주관하게 하는 것, 나 자신의 주인되게 하신 것, 내가 한 모든일을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신 것, 그것이 바로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 성취할수 있는 단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성경을 살펴보게 되면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즉 하나님과 아담과 해와는 일문일답을 한거죠. 가인과 아벨도 일문일답을 했습니다. 창세기 4장 9절을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에 하나님이 피를 본 심정을 가지고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가인이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리니까 라고 부모앞에 버릇없는 자식이 반발하는 것 처럼 하나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평상시 대화처럼 이야기하고 있던 거죠.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는 이후에도 하나님과 직접 대화할수 있었다라는 얘기입니다.
민세기 11장 32절을 보면 모세는 아주 불같은 성격이었다고 하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망지게 될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40년동안 광야에서 단련을 시키시고 모세를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거에요. 그이후에 그일을 맡기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도 일문일답을 하셨고 가인가 아벨도 마찬가지고 모세도 하나님이 직접 교육시키셨다고 그랬어요. 아버님 말씀을 들으시면 아버님 말씀도 어린시절에 하나님 직접 가르치셨다고 하셨어요. 자연의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오둑신을 통해서 아버님을 보호해주셨다고 아버님꼐서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러니까 아버님도 결론은 하나님과 일문일답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을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일문일답을 할수 있는 경지까지 다따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타락을 하였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너무나도 긴 세월을 지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를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만약에 하나님과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한다.. 왜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험하게 변하겠습니까? 아마도 변하지 않았을거에요. 적어도 선한 세상이 만히 전개 될 것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정말 곤악스러울때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자식을 위해서 몫음을 내넣은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 앞에서는 무조건적 사랑을 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이것은 정직이였어요. 수천 수만년간 변하지 않은 법칙이였었는데 요즘 뉴스를 보니까 개임을하다 자식이 방해하니까 자식을 죽이고 귀찮다고 죽이고 고친다고 죽인고 말안듣는다고 죽이고... 이것은 도저히 인간으로서 도와줄수 없는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지난번에 뉴스를 보니까 학교로 나와야 될 학생이 소재 파악 못하는 학생이 200명 가까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파악안되는 학생이 19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에 학대를 인해서 타살된 가능성을 놓고 수사를 벌리고 있다고... 있을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그렇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믿을수 없는 관계가 정말로 갈때까지 간 ... 정말 타락한 인간들의 몇명 ... 하나님이 입장에서 도와줄수 잆는 그런 입장에서 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을 보면 얼마나 영성이 많은가 느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성상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인간이고 상징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만물이죠. 그러니까 만물만 봐도 자연만 봐도 신비 속에 따뜻해집니다. 고속도로를 달려 가다가 인간이 자연환경을 파괴해서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가지 않으 곳을 가려고 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닿지 않은 아주 깊은 산중에 들어가려고 하고 보통 사람들이 갈 수 없는 높은 산에 가려고 한 것은 자연이 훼손되지 않은 곳에 가려고 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연이야말로 저희에게 신령한 느낌을 주는 것이 자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도인들도 결국에는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 것도 결국은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 기를 받고 본연의 자기를 찾아보고 거기에서 많은 깨닮을 얻는 것은 바로 자연이 자연이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느낄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심생활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합니까? 그러나 주말이면 모두 다 신산유복을 찾아 달리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속에서 인간성을 볼수가 없으니까 바로 만물세계에 가서 하나님의 상징적인 영성을 체득하려고 하고 또 거기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느끼고자 하는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영성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아버님 말씀에도 항상 양명성을 주장하시잖아요. 영성에도 양면성이 있어요. 내면성이 있고 외면성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영성이지만 안쪽이 있고 바깥쪽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안쪽에 영성을 수집적 영성이라고 합니다. 내면적 영성, 이 영성은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집적 영성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바깥쪽에서 밖에 있는 외면적 영성은 바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외면적 영성이라고 할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집적 영성은 개인이 영적인 체험을 하는 것, 수시로 하나님 품속에 안김으로서 기쁨과 희애를 느끼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혼독하기도 하는 그러나 상당히 품요럽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이 수집적 영성입니다. 하늘과의 관계가 바로 수집적 영성을 통해서 각가하될수 있다는 그런 얘기가 될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수집적 영성과 수평적 영성은 언제나 선 안밖에 관계와 같기 때문에 불가분의 관계 떨어지러야 떨어질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수집적인 영성 바탕 위에 스평적인 영성이 형성이 된다. 아버님은 항상 정오정착과 90각도를 강조하시고 우리에게 규육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수집적인 영성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수집 형성이 돼야 한다. 하나님과 대했을때 전혀 그림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오에 서 있으면 그림자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 머리 위에 햇빛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래야 한다는 거에요. 내가 하나님과 종적인 관계를 이루었을 때 조금도 기울려서는 안된다. 정오정착, 그림자없는 자기에 모든 것을 버린 상태에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대해야 한다. 이것이 주집적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성을 개발하는 것은 결국은 내가 나라는 것이 있어서는 개발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불교에 입문하신 분들은 3년동안 벽만 쳐다보고 있다는 거에요. 가만히 앉아서..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서 그런다는 거에요. 그래서 영성개발이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말로 표현하려면 참자기를 찾아가는 것이다. 결국은 내 주인은 누구입니까? 내몸의 주인은 마음이고 마음의 주인은 영성이고 영성의 주인은 신성이고 신성의 주인은 결국엔 하나님. 결국 나의 주인은 누구냐?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때에 영성이라면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 아버지라고 고백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는 그 감격을 느끼고 기쁨을 체율하고 그 기쁨을 이웃을 통해서도 느끼고 사랑을 느끼고 생명을 느끼고 서로가 일체화돼서 공동체의 삶을 살아갈수 있는 것, 그것이 수평적 영성의 기본적인 생활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평적 영성은 다시 말하면 세상을 향한 섬김이라고 한마디로 줄일수가 있습니다.
우리 종교와 종교의 본질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과 자비는 자기 혼자만에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자비를 배우고 체득하고 사랑과 자비의 인격자가 됐다면 사랑과 자비를 세상을 향해서 섬기는 것, 사랑과 실천을 향한 곳이 본연적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이제는 수평적인 영성을 몸을 통에서 이웃을 만나는 것이다. 몸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김으로서 이웃에게서 하나님을 갈병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신앙생활을 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영적인 내면에서 본다면 내가 몸을 통해서 생활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바로 수평적인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훈독한 말씀 중에 아버님 말씀이 '하나님 권능이 인류의 생활 속에 시현이 된다' '우리 일과 속에서도 우리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체득하는 몸으로 체득하는 그러한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버님의 이 말씀은 지금 이미 와 계시다는 거에요. 내옆에 하나님이 하늘부모님이 다 와 계시는데 내가 영성의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오시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옆에 와 계시면서 내 이야기를 바라고 내 영성이 열기를 바라고 내 집에 와서 계시는 하나님을 내가 받아들알수 았는 그런 내가 되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그것이 돼야 평화세계에서의 기점이 생긴다고 말씀을하셔야 돼요.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한 하나의 징건다리 역할을 할 뿐이지 거기에 얾매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성개발이 됐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오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2000년전에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물을 가지고도 흙을 만드시고 안쟁뱅이도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이적기사를 행하셨죠. 그렇게 이적기사가 많은데도 세상을 꼼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적반자라고 죽이러 간 .. 모세가 바로 궁전에 들어가 10재앙을 일으켰죠. 결국은 바로가 항복을 했습니다. 거기서 바로가 항복을 했기 떄문에 탈출할수가 있었던 거에요. 십자가를 통해서 회개를 시켰고 그때 모두가 항복했는데 하루 이틀 모세가 육신을 도망갈때 이 사람들이 다시 생각해 보니까 항복했다는 손을 내려넣고 창칼을 들고 모세를 잡아죽이겠다고 쫓아왔습니다.
영적인 형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항복을 했다가 갑자기 개인적인 생각을 하니까 바로 창칼을 들고 그사람을 쫓아갔다는 거에요. 그래서 영적인 갈행이라는 것은 어떠한 일시적인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성을 조금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지속성이 떨어지느냐? 인간의 마음은 환경에 따라 변하고 기분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바로왕도 자기가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자기가 항복을 했어요. 그런데 결국은 나중에 쫓아간 것은 뭐냐? 자기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을 드리면 내가 영성개발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실체를 거기서 발견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한 그 체험으로 내 인격을 강화시키는 거에요. 이것이 꼭 나를 참사람을 만들고 이것이 내 가정을 참가정을 만들고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킬수 있는 사랑과 자비와 생명의 인격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뭉쳐살다가보면 환경에 따라서 여러가지 생각을 다시합니다. 기분과 감정에 따라서도 수시로 변하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수가 있어요. 그런 내 모습이 발견할때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변하는 모습이 깊어지면 하나님의 실체를 망막하게 됩니다. 참부모님의 실체도 망막하게 돼요. 그것은 내가 아직 참사람이 아니라서... 그러니까 우리가 영성개발을 통해서 순수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가야돼.. 인간의 본성을 찾아 참사람이 되고 본성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서 보다 더 본성적인 인간 그런 사회를 이루는 것, 그러므로서 천일국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정말로 전도가 된다는 그런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성개발을 통해서 너무 영성에 매달려가지고 영적인 것에 너무 의존하는 것 보다는 내가 실체적인 생활, 현실을 살면서 영적인 것에 매달리다 보면 현실을 도피하는 사람이 된다. 많은 도인들을 보십시오. 자기는 나름대로 산속에서 30,40,50년 평생 도를 닦다가 자기의 성취를 엄청나게 있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자기 한사람을 도를 닦는 것이 자기 한사람 성취하는 것이지 결국에는 그사람들은 뭐냐? 현실을 도피해서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는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성개발을 통해서 내가 참사람이 되는 것,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에 그것을 체휼하는 것, 내 영성개발을 통해서 하나님과 일문일답을 할수 있는 관계에 접근하는 것, 그것이 우리들이 하나님의 실체를 발견하고 나의 참사람을 발견해서 내가 그 인격을 닦아내고 내 본성의 인간으로 완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몫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야목교회 식구님들은 정말 내가 영성개발을 통해서 정말 영적으로 매달리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서 아버님을 중심삼고 참사람이 되는 그러한 야목식구님들이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식사헌신: 이또 후미꼬 권사님, 스가노 료꼬 권사님, 스가노 메구미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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